바람에 풍경 달기
어느 비 오는 날의 시놉시스
조혜강
2009. 6. 22. 19:00
오늘은 저녁 6시에 모임이 있는 날이다. 롯데 백화점에서 만나 분위기 있는 집을 골라 저녁을 먹고, 2차도 가게 되어 있다. 수업이 끝난 시간이 오후 2시니까 4시간의 여유가 있는데 집으 로 갔다가 다시 나오려면 왔다 갔다 시간만 낭비할 것 같아서 어떻게 하면 모임 시간까지 적절하게 즐길까 궁리하다가 롯데 시네마에서 영화 한 편 보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9개의 영화관에서 상연되고 있는 제목들을 쭈욱 훑어보고 시간 을 맞추어 보니 3시 30분에 시작하는 '포세이돈'이 눈에 들어왔 다. 번호표를 뽑고 앉아 있으려니 차례가 와서 예매를 하는데 7 천원 하는 관람료를 4천원에 끊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장기기증 등록증으로 3천원의 할인 혜택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시간이 되어 영화가 시작되었다. 때는 12월 31일 새해를 앞두고 북대서양 한가운데를 항해 중인 호화 유람선 '포세이돈' 800개의 객실을 갖춘 이 배에선 연말파티가 한창이다. 모두들 샴페인 잔 을 들어 다가오는 새해를 축하하고 있는 순간, 일등 항해사는 저 멀리 거대한 파랑이 배를 향해 초고속으로 돌진하고 있음을 발견 한다. 순식간에 배는 뒤집히고, 축제에 들떠 있던 승객과 선원들은 거대 한 파도에 휩쓸리고 배의 구조물들이 무너지면서 가스가 폭발해 불길에 휩싸인 배는 바다로 가라앉기 시작하는 사이 몇 사람만이 목숨을 건 탈출을 감행한다. 생면부지인데도 서로에게 목숨을 의 지하며 갖은 고난을 겪으며 거대한 바다와 맞서 살아남는 최후의 몇 사람이 선체에 매달려 있는 보트를 타는 순간 포세이돈은 바다 밑으로 가라앉는다. 거대한 스케일에 압도당해 숨을 죽인 채 영화가 끝났다. 그래도 시간이 남는다. 백화점을 한 바퀴 돌고 있는데 연옥 씨가 도착했다 는 전화가 왔다. 그리고 줄줄이 다들 모여들었다. 비가 와서 바깥 으로 나가기도 그렇고 하여 백화점 8층 식당가에서 저녁을 먹었다. 밖으로 나오려니 비가 세차게 내리고 있다. 2차로 어디를 갈까 의 논을 했는데, 바로 옆에 있는 롯데호텔 '정글'에서 칵테일 한 잔 하면서 담소를 나누는 게 좋겠다는 결론이 났다. 파랑 빛깔의 '블루하와이안', 빨강 빛깔의 '마이타이', 노랑 빛깔 의 '피나콜라다' 등을 시키면서 우리들은 술을 못하니 순하게 만들 어 달라고 거듭 당부한다. 식탁에 놓이는 칵테일 잔들은 화려한 조명 아래 호화롭기까지 하다. 나는 파랑 색의 '블루하와이안'을 들었다. 빛깔이 곱다. 달짝지근한 맛이 입안을 간질인다. 학교에서부터 진동으로 해 놓은 손 전화를 보니 부재 중 전화가 3통이나 된다. 그 중 하나는 음성메시지를 남겼는데 "혜강 씨, 난데요. 목소리 듣고 싶은데 전화 연결이 안 되네. 혹시 전화 연결이 되면 전화 좀 주세요. 내 기다리고 있을게. 안녕!" 오랫동안 우정을 나눈 사이지만 이런 메시지는 처음이다. 특히 일 과가 끝난 밤에 전화를 해 달라니. 조용히 빠져 나와 호텔 로비 한 쪽에서 전화를 한다. 신호음이 한참 이어진 후 수화기 저 쪽에서 그의 목소리가 달려온다. "다 때려치우고 여행이나 떠났으면 좋겠다." 갑자기 가슴이 뜨끈해진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장대처럼 굵은 비가 좍좍 내리는 빗물 속으로 그의 외로움이 쏟아 진다. 천리향처럼 향기 은은하고 샐비어처럼 붉은 열정으로 삶을 사랑하는 그가 얼마나 힘들면 내게 이런 말을 할까? 깊고 여유 있는 산의 모습처럼, 때론 깊이도 넓이도 알 수 없는 거 대한 바다처럼 포효하는 그의 내면은 이른 새벽 풀잎에 매달린 이 슬처럼 고아하고, 여리고, 섬세하다. 그는 나에게 많은 우정을 무언으로 가르쳐 주고 있기에 기쁜 일이 있어도 슬픈 일이 있어도 그를 보고, 길을 걷다가도 그를 쳐다보면 일상에서 일어나는 애증의 갈등도 그의 말없는 가르침 속에서 아늑 한 포옹(抱擁)이 되어 작고 초라한 내 문학의 태반(胎盤)을 기쁘게 흔들어댄다. 가을날의 물살처럼 소슬한 의지로, 봄날의 새싹처럼 늠 름한 기상으로, 난만하게 움트고 피어나게 하니 내 인생의 가장 고귀 한 시정(詩情)을 조율하고 있는 듯하다. 전화하는 사이 녹아 버린 얼음 때문인지 잔이 꽉 찬다. 파란 빛깔이 너무 곱다. 바다처럼 시원한 빛, 바다가 좋아 바다를 사랑하는 사람! 그의 외로움을 마시 듯, 그의 슬픔을 마시 듯 한 모금을 마시며, 부디 그의 심연에 잡풀이 돋아나지 않고 아름다운 꽃들만 무성하게 피어나 벌 나비가 떼를 지어 날아들기를 눈물겹도록 간절한 구원의 기도를 올린다. 가끔 아주 가끔 그의 향기가 그리울 때, 나는 한 마리 벌이나 나비가 되어 그의 냄새를 쫓아 그의 맑은 심연 속으로 날아들고 싶다. 지란 (芝蘭)처럼 어질고, 곧고 질긴 생명의 시정(詩情)으로 사랑의 몸부림을 치고 싶다. 밤중이 다 돼서 돌아오는 차 속에는 빗물이 깊이도 모를 그리움을 타고 한없이 한없이 내리고. (3년 전 어느 비 오는 날의 시놉시스입니다.) - 혜 강 - (2006. 6.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