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

* 가을엔 떠나고 싶다 *

조혜강 2005. 10. 23. 22:08

휴일에 한자서당을 운영하는 박 선생과 드라이브를 나갔다.

박 선생과는 옛날에 한 학교에서 근무한 적이 있어 잘 아는

사이다. 인정이 많은 그녀는 자주 안부 전화를 해 오고,

시간이 되면 함께 드라이브를 즐기는 편이다.

 

하늘은 높푸르고 계곡은 맑고도 깊다. 잎잎이 춤추던 나뭇잎은

하나 둘 고운 물이 들어가고, 가을꽃은 분주하게 피어난다.

집집마다 일상은 분주하겠지만 마을의 겉모습은 조용하여

평화롭다.

 

금화빛 들판은 어느새 빈 들녘으로 늘어나고, 논둑엔 억새꽃이

하늘하늘 하얗게 피어나 갈 햇볕에 반짝반짝 윤을 내고 먼저 핀

꽃은 가을걷이를 서두르고 있다. 코스모스, 들국화 길섶의 풀꽃

들이 반갑다고 상긋상긋 웃는다. 마음에 미세한 여울이 흐르는

것인가!

미세함이 주는 선물인 평화로움 속으로 너울너울 잠겨 든다.

 

"산아, 푸른 산아,

네 가슴 향기로운 풀밭에 엎드리면,

나는 가슴이 울어라,

흐르는 골짜기 스며드는 물소리에,

내사 줄줄줄 가슴이 울어라,

아득히 가 버린 것 잊어버린 하늘과,

아른아른 오지 않는 보고 싶은 하늘에,

어쩌면 만나도 질 볼이 고운 사람이,

난 혼자 그리워라,

가슴으로 그리워라"

 

박두진 님의 <靑山道>를 읊어 본다. 내면의 생각들이

일제히 몸을 일으키며 잠자는 자각을 흔들어 깨운다.

차는 남해안을 따라 뱀처럼 구불구불 기어간다. 청옥빛 하늘에

새하얀 구름 조각들, 옥빛 만경창파를 바라보며 가슴은 철썩철썩

파도가 일어난다. 긴 해변이 나오는 걸 보니 '송정 해수욕장'인가

보다. 바다가 꼭 껴안고 있는 죽도 입구에 차를 세운다. 섬 입구엔

천리향나무가 크게 반긴다. 돌계단을 쭉 따라 송림 사이로 들어서니

낯익은 풀꽃들이 무리 지어 반긴다. 섬 정상에서 바다로 내려가니

송일정이란 정자가 앉아 있다.

 

우리는 그곳으로 올라섰다. 난간에 나란히 앉아 본다. 차암 좋구나!

바닷물을 손아귀에 움킨다.

금새 새파랗게 물이 드는 것 같다.

둘은 이런 저런 얘기들을 조잘거린다. 난간에 쭉 둘러앉은 사람들이

낯익은 모습으로 다가온다.

 

천년 숨결이 뜨겁게 철썩철썩 뛰어와선 섬을 애무하고는 이내 가

버린다. 그때마다 섬은 열꽃을 피우며 몸살을 하건만 모르는 체

또다시 뛰어와선 그렇게 가 버리면 섬도 울고, 바다도 우는 것 같다.

둘은 영겁의 사랑을 하는가!

 

함께 하면서도 하나가 아닌 것 이건 고귀한 아름다움이다. 서로를

지지하고 인정하고, 사랑하는 상보적 관계를 유지하는 이들의

사랑이 아름다이 애처롭다. 섬이 있어 아름다운 해변, 바다가 있어

송정 푸른 파도가 있어 더욱 고운 섬... 염원의 기도에 실려 오는

갯바람에 그리운 님을 기다리는 천리향 내음이 가득한 죽도!

대나무가 많아 죽도라 한단다. 풍광이 아름다워 예부터 시인

묵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곳, 오늘은 나 여기 한 시인으로

송일정을 오른다.

 

바다도 좋다 하고, 청산도 좋다 하여 바다와 청산이 한 곳에

만났을까! 서기로운 구름이 뭉게뭉게 산란하는 것 같다.

붉은 햇살을 두 팔로 가르는 갈매기들의 원무가 꽃처럼 뭉글뭉글

피어난다. 나뭇잎처럼 해원을 가파르게 떠다니는 윈드서핑이

한 개에서 두 개 세 개로 늘어나 나란히 떠다닌다.

 

바다, 푸른 바다! 언제 보아도 그리움이 남는 곳!

내가 그대에게 줄 것은 식지 않은 내 사랑 뿐

사는 동안 내내 그대 향한 내 사랑을 끓이고 있겠지

 

가을엔 떠나고 싶다.

기차를 타고 무작정 가다가 마음이 닿는 어느 고을에 내려 그

동네를 안고 있는 산이나 강을 보고 싶다. 산색이 아름다운 마을의

사람들을 만나 보고,

강물이 맑게 흐르는 동네의 소박한 사람들을 만나 보고,

그들과 스스럼없는 얘기를 나누며 자연 속에서 하나의 풍경이

되고 싶다

 

단풍 속에선 단풍이 되고...

낙엽 속에선 낙엽이 되고...

 

- 혜 강 - (2005. 10.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