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늙지 않는 봄 *
낙동강 유역의 김해평야
끝없이 펼쳐진 푸른 들판
길섶 풀꽃들이 살갑게 피어나는
인정이 옹기종기 무릎 맞댄 동네
얼굴색이 햇살처럼 밝고 좋은 소년과
탱잣빛처럼 누렇고 창백한 소녀가
함께 살고 있었다
딱지치기도 같이 하고
연날리기도 같이 하고
공부도 같이 하고
신작로를 달리기도 하고
논둑길에서 메뚜기를 잡기도 하고
도랑물의 붕어도 두 손으로 떠 담기도 하고
이따금 들나물 캐는 소녀의 바구니에
질경이 뿌리채 쑥쑥 뽑아
장난스레 건네 주기도 하고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소녀는 무심해 갔지만
소년은 더 좋았다
소녀를 볼 때마다 심장이 뛰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새벽녘 감나무 아래서
설움처럼 뚝뚝 떨어지는
감꽃을 주어 모아
감목걸이 만들어
가느다란 목에 걸어주며
행여나 행여나 마음 알아줄까
간절하게 내다 본 세월인데
소녀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몸 짓 하나 끄덕하지 않았다
먼 산을 넘어가는 구름처럼
세월은 어이없고
마냥 조이던 가슴
주천강의 잘피처럼 치렁한 그리움은
하늘로 올라가
하얀 별들을 쏟아냈다
가을 단풍 빛 부신 어느 날
소년과 소녀는 만났다
40 년만이다
은빛 아릿한 머릿결을
기품 있게 쓰다듬으며
가을 산처럼 빛이 고운 소년은
목소리를 건넨다
"친구야 너무나 반갑다
내가 니 얼마나 좋아했는데
너의 모습을 보고 싶었다
40년 동안 너의 이름만 기억하고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생각만 하고
한번 찾아보겠다는 생각을 못하여서 미안하다
지금부터라도 자주 만나서
옛 동산의 이야기를 하자꾸나"
보리싹 새파란 밭고랑을 깨우며
소녀의 연둣빛 앙가슴이 생긋 피어난다
"고마워
그 땐 철이 없었어
허지만 살면서 내 유년의 뜰엔
늘 니가 있었어."
소년이 손을 내 민다
소녀도 가만 가만 내 민다
40 년의 빈 뜨락에
이슥하도록 얘기가 심어진다
감자꽃처럼 하얀 얘기가
*주천강 : 주남저수지에서 흘러나온 물이 김해평야를
가로질러 낙동강으로 흘러드는 강
- 혜 강 - (2006. 11.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