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유년시절에 병치레를 자주 하여 몹시도 병약하였다. 주로 위가
약해 배탈이 자주 났었다. 봄에 보리가 파릇하게 들판을 장식할 때
면 봄을 타 입맛을 잃어 봄, 여름 내내 밥을 먹지 못해 고생했으며,
가을이 와 입맛이 돌아 밥을 제대로 먹을라치면 횟배를 앓아 가을,
겨울 동안 내내 고생하는 바람에 키가 클 시간이 없어 키도 작았고,
몸도 부실하였다.
우리 집 식구들은 모두 키가 커서 동네 사람들은 제는 저 집 식구
아닌 것 같다. 조렇게 작으니... 하는 소리를 많이 듣곤 하였다. 우
리 어머님이 나를 제외한 7남매 키우는 것보다 나 키우는 것이 더 힘
들었다고 하실 만치... 허지만 초등하교 6학년 때부터는 봄, 가을 계
절은 탔지만 병치레를 덜하여 키도 쑥쑥 자라고 몸도 튼튼해졌다. 헌
데 지금까지도 봄, 가을이면 계절을 많이 탄다.
당시엔 양약을 쓰지 않고 주로 한약을 달여 먹었다. 밥을 제대로 먹
지 못해 영양실조에 걸려도 한약, 배가 아파도 한약을 먹었다. 먹지
않으려는 나에게 할머니는 콩강정을 동그랗게 만들어서 "이것 마시면
하나 줄 테니 마셔보아라." 하시면 나는 그것 먹을 욕심으로 온갖 인상
을 찌푸려가며 마시면 속에서 받지 않아 울컥 넘어왔다. 그러면 할
머니께선 "이 더운데 할미가 땡볕에 앉아 몇 시간을 고생하여 달였는데,
그것 하나 못 넘기나? 가시나가 보통 애물단지가 아니야!" 혀를 차시곤
또다시 약탕에 약을 넣고 달이시곤 하셨다.
어머니는 "아기 때부터 소화를 못 시켜 한약을 달여 먹였는데, 찌꺼기를
쌓아놓으면 큰 산 만큼 할 끼다. 커서 사람 노릇은 할 란가 모르겠다."
하시며 울고 있는 나를 달래곤 하셨다.
우리 할머니는 그 당시로는 상당히 유식한 분이셨다. 한글을 제대로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던 그 시절에 고전 소설--- 박씨전, 조웅전, 춘향
전 등 수십 권 갖고 계셨는데, 지금 같이 활자본이 아닌 한지에 붓으로
쓴 필사본이었다. 그 많은 소설을 거의 외우다시피 하셨다. 이웃에
마실을 다녀오시면 깨끗이 씻으시고 요를 깔고 누우신 후엔 꼭 소설을
외우시는데, 나는 하도 지속적으로 들어서 어렸을 적에도 내용을 거의
알고 있었다.
이런 할머니께서 체하여 배가 아프다거나 머리가 아프거나 몸 상태가
좋지 않을 시엔 나를 대청마루 끝에 앉히시곤 마루에 서서 진언을 외우
시는데, 박으로 만든 바가지에다 물을 담고 된장을 풀어서 부엌에서 쓰
는 쇠로 만든 식칼을 들고선 진언을 외우신다. 그때는 지금처럼 녹 안
쓰는 강철로 만든 칼이 있을 리 만 무다.
칼등을 머리에 댔다 떼었다 하시며 한 30분 이상을 외우시곤 대문을
향해 식칼을 던지는데, 다행히 칼끝이 밖으로 향하면 끝나지만, 그렇
지 않으면 또 다시 처음부터 외우신 후에 식칼을 던지신다. 두 번째는
주로 칼끝이 밖으로 향하는데, 칼끝이 떨어진 그 자리에 열 십자를 그
리고 그 중심에 칼을 꽂으신다. 이때 칼날이 밖으로 향하게 꽂으신다.
그런 후 바가지에 든 것을 사방으로 뿌리시며 부정 탄다고 외인 금지를
하는 방법으로 대문을 걸어 잠그신다. 진언 내용은 꽤 어렸을 적이라
기억이 별로 없는데, 중간 부분에 "좌청룡, 우백호, 남주작, 북현무"
라는 내용과 끝 부분에 "헛세 속거천리"라는 말만 기억된다.
그러는 사이 어머니는 방을 따뜻하게 불을 지피시고, 나는 데워진 방
으로 들어가면 할머니는 내 배를 주무르시며 " 내 손은 약손이고 우리
손녀 배는 똥배다." 근 한 시간 이상 앉아 진언 외우시는 할머니의 칼등
을 머리에 섬짓섬짓 느끼며 긴장한 탓에 스르르 잠이 든다. 한 잠 자고
나면 한결 나은 것 같아 살 만 하였다.
백과사전을 보면 진언(眞言)을 "힌두교와 불교에서 신비하고 영적인
능력을 가진다고 생각되는 신성한 말로서 큰 소리로 또는 마음속으
로만 부르면서 일정시간 계속 반복하기도 하고 한번에 끝내기도 한
다"고 쓰여있다.
할머니는 오자 하나 없이 청산유수처럼 잘도 외우셨는데, 신기한 것은
효력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일이 반복되다시피 하니까 할머니께서 앉
으라고 하시곤 진언을 외우기 시작하시면 아, 이제 좀 낫겠구나! 하는
희망을 갖게 된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플라시보 효과(Placebo effect)'가 아닌가 한다.
실제로 일어나는 일과 관련하여 기대와 믿음 때문에 치료효과가 있다
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할머니는 나에게 있어 '플라시보'였었다.
할머니가 진언을 외우시는 동안 온몸의 에너지가 진언으로 분출하는
것이 느껴졌다. 아픈 손녀를 낫게 하시려는 할머니의 간절한 염원과
정성, 사랑 그리고 내가 갖는 기대와 믿음 때문에 그런 결과물이 된 것
같다.
오늘따라 유년 시절이 그립고 유난스레 할머님이 보고픈 날이다.
- 혜 강 - (2007. 6.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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