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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산장 일기(1)

by 조혜강 2007. 1. 24.

사윈 겨울햇살이 불러내어 산장의 빗장을 연다. 매홧골을

동강내어 흐르는 계곡을 따라 산자락을 걷는데 군데군데 푸른

대숲이 반긴다. 논두렁 밭두렁엔 아직도 계절이 아쉬워 떠날

수 없어 머뭇거리는 햇살 받은 억새풀이 계곡을 채운 갈대풀

과 어울려 햇살보다 더 눈부시다.

 

30분 정도 걸었더니 갈림길이 나온다. 오른 쪽 매화 못을 지

나 산을 오르는 길과 왼 쪽 비탈진 산감나무 밭을 지나 산을

오르는 두 길이 있다. 산감나무 밭쪽으로 걸어간다. 메마른

풀잎에도 생명이 있으렷다! 발자국이 심히 조심스럽다.

 

산중으로 들어갈 수록 점점 가늘어지는 계곡에는 낙엽이 무더

기로 쌓여있다. 억새 숲을 지나 하얀 찻집 앞에 선다. 오죽에

가려 위쪽만 하얗게 보이는 찻집 앞에 계곡을 걸친 외나무다리

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몇 년 전에 이곳에서 차를 마신 생

각이 난다. 베옷에 화장기 없이 단아한 여인이 따라주는 허브차

향이 입안에 가득 찬다. 따끈한 차 한 잔 하고 산을 오를까 하여

현관을 찾았더니 문이 굳게 잠겨 있다.

 

옆집 아트센터에 물어보니 지난 봄부터 문을 닫았다고 한다.

산중에 무슨 손님이 와서 유지될까 싶었는데 결국 문을 닫았구나

싶다. 발목이 푹푹 빠지는 낙엽을 밟으며 산허리를 돌아가니 사람

들이 별로 다니지 않아 낙엽이 많이 쌓여있다.

 

산은 어느새 옷을 벗었구나! 아름다운 청춘을 사르던 절정의 시대

를 그려본다. 남근 바위를 지나고 본격적으로 산을 오르기 시작한

. 이 산은 꼭 여인의 하체를 닮았다고들 한다. 낙엽송이 다 떨어

진 발가벗은 산에 산마루에만 소나무가 오목하게 모여있는 것도 그

렇다. 사람 그림자 하나 없는 산은 겨울 나뭇가지와 바람과 낙엽을

안고 하늘 향해 깃발처럼 펄럭이고 있다. 가지 사이로 새파란 하늘

이 둥둥 떠가고 있다.

 

낙엽이 무릎에 찬다. 나뭇가지를 헤치며 정상에 오르니 산새들이

놀라 선잠을 깬 듯 하품하는 소리! 숨이 턱에 찬다. 드디어 산마

루에 올랐다. 쉬어 가는 바람소리에 억새숲은 서로 몸을 비비느라

바쁘고, 소나무 바위틈엔 겹겹이 쌓여진 고요가 깨어나는 듯 하다.

 

발아래 세상을 굽어본다. 저 멀리 바다도 보인다. 갖고 온 산국화

몇 잎에 뜨거운 물을 부으니 노오란 국화가 동동 뜨며 샛노란 찻

물이 우러난다. 향긋한 산국화 차 향에 취하고 보니 멀리 있는 벗

이 못 견디게 그립구나! 솔바람 소리가 나는 그와 나란히 앉아 사

람을, 삶을, 세상을 얘기하고 싶다.

 

하늘과 바다와 햇살과 바람, 그리고 새소리와 물소리가 만들어 낸

조화로운 세상을 보다 나는 무엇인가 하는 생각에 잠긴다. 무심히

지나치는 바람, 정처 없는 구름, 지금도 한두 개씩 떨어지는 낙엽

겨울 숲을 흔들며 여윈 가지 쓰다듬는 저 바람은... 손을 뻗어도

닿지 못하는 수평선, 파도가 토해내는 무수한 포말...!

 

눈발이라도 내렸으면 좋겠다! 여윈 나뭇가지들에게, 나래 묻은 산새

에게 온기를 주고 마음 시린 사람들의 가슴을 덮어주는 따스한 이불

같은 눈이 내렸으면 참 좋겠다!

 

산을 내려오기 시작한다. 돌멩이가 많아 잘못하면 넘어지기 쉬워

조심스레 발걸음 한다. 언제나 내려오는 길은 빠르다. 어느새 남근바

위를 지난다. 벗은 나뭇가지들이 회색 토끼털처럼 부드러워 보인다.

저 위를 뒹굴어 보고 싶구나!

 

매화못까지 왔다. 대운산 한 자락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물 위엔 철새

들이 유유하고, 못둑 위에 갈대 숲이 흔들리는 아름다운 풍경과 푸른

하늘을 담고 있는 물 속은 물 위의 세상보다 더 아름다운 것 같다.

못을 향해 근처 산들이 병풍처럼 서서 어깨동무를 하고 있다.

산 그림자가 내려오는 못을 두고 돌아서니 산 그림자가 나를 따른다.

나와 산 그림자의 동행도 싫지 않구나!

 

- 혜 강 - (2007. 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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