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6일, 오늘은 봄소풍을 가는 날이다. 10시에 동천체육관 앞에서 평화관광버스가 출발했다. 비가 한두 방울 떨어지는 구름 잔뜩 끼인 날씨다. 내가 비를 좋아해서인지 아니면 우리 학교 가 비를 좋아함인지 행사 때마다 비가 잘 온다. 오늘의 행선지는 경주 일원인 경주 괘릉-->월성장항리사지 서 오층석탑-->감은사지-->이 견대-->어물동 마애여래좌상 순이다.
사방에 신록이 춤을 추는 가운데 불타는 듯 작열하는 연상홍이 그의 에너지를 마음껏 품어 낸다. 길가에 납작 엎드린 꽃잔디도 질세라 시선을 잡고 놓지 않는다. 마치 초등학교 때 소 풍 가는 아이의 마음인 양 가슴이 달싹거린다. 내 옆에는 입담 좋은 서해숙 선생님이 앉아 연신 재미있는 얘기를 들려준다. 40 분쯤 달려 맨 처음으로 도착한 곳은 경주 괘릉이다. 오늘 문화 해설을 맡으신 고희정 선생님은 머리 전체를 가린 모자를 쓰고 얼굴만 빠꿈이 내 놓은 모습이 너무 귀엽다. 그 모자 어디서 나왔느냐고 물었더니 공익요원들이 쓰는 모자란다.
경주 괘릉은 경북 경주시 외동읍(外東邑) 괘릉리 산 17에 있는 798년(신라) 경의 능으로서 1963년 1월 21일에 사적 제 26호 지정되었으며 면적은 7.53ha에 해당하는 능으로 능비가 없 어 누구의 능인지 확실하지 않으나, '삼국유사'에 “원성왕릉이 토함산 동곡사에 있는데, 동 곡사는 당시의 숭복사로 최치원이 비문을 쓴 비석이 있다”는 기록과 지금의 괘릉 인근에 숭 복사터가 있는 것으로 보아 원성왕의 능이라고 추정되는 괘릉(掛陵)은 작은 연못이 있어 관 을 수면 위에 걸어 무덤을 만들었다는 속설에 따라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경주시는 사업비 11억8천만 원을 들여 외동읍 괘릉(掛陵) 주변을 새 단장했으며 2008년 1 월부터 왕릉을 둘러싸고 있는 담을 철거하고 면적 1천330㎡의 주차장을 조성했으며 주변 도 로 174m 구간을 폭 6m로 확장했다고 한다.
다음으로 찾아간 월성장항리사지서오층석탑 (月城獐項里寺址西五層石塔)는 국보 제236호로 1987. 3. 9일에 지정되었으며 경주시 양북면 장항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유적건조물로 탑 이다. 문화재청에 따르면 장항리사지는 토함산 동쪽의 한 능선이 끝나는 기슭에 마련된 절터로서, 절의 이름을 정확히 알 수 없어 마을의 이름인 '장항리'를 따서 장항리사지라 부르고 있다. 이곳에는 현재 금당터 를 중심으로 동탑과 서탑이 나란히 서 있는데, 1923년 도굴범에 의해 붕괴된 것을 1932년에 복원이 가능한 서탑만을 새로이 복원해 놓았다. 동탑은 1층 탑신(塔身)과 5층까지의 지붕돌만 남아있으나, 서탑은 약간 소실된 것을 빼고는 비교적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다. 서탑은 2층의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갖추고 있는 모습이다. 기단부는 비교적 넓게 만들어져 안정감이 있으며, 네 모서리와 각 면의 가운데에 기둥을 본떠 조각했다고 하며 전체 비례가 아름답고 조각수법도 우수한 8세기의 걸작으로 평가되고 있는 이 탑은 통일신라시대의 석탑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된다고 한다.
탑 아래 개울가에는 미진 하나 없는 듯한 푸른 시냇물이 우리를 환영하는 듯 웃음소리도 청아 하다. 돗자리를 깔고 둘러 앉아 점심을 먹는다. 밥과 반찬과 떡, 수육, 과일 등을 준비하느라 학생들의 수고가 많았겠다. 구름 끼인 하늘에 비 온 뒤의 깨끗한 세상에서 불어오는 푸른 바 람에다 정성 들인 점심을 먹으니 그 맛 또한 일품이라!
흡족한 식사 후의 조금 나른한 몸을 실은 버스가 찾아간 곳은 사적 제 31호인 감은사지(感恩 寺址). 문무왕은 삼국통일을 이룬 후 나라를 더욱 굳게 지키기 위해 감은사를 짓기 시작했으 며 신라 31대 신문왕(神文王)이 아버지 문무왕(文武王)의 뜻을 받들어 즉위한 이듬해(682)에 완공하고 감은사(感恩寺)라고 불렀다. 1959년과 1997년의 동·서탑 해체 수리 때 삼층탑신에 마련된 사리공(舍利孔) 속에 당대를 대 표하는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가 발견되어 신라의 금속조각이 성당(盛唐)을 능가하고 있다. 동서로 두 탑을 세우고 이 두 석탑 사이의 중심을 지나는 남북선상에 중문과 금당, 강당을 세 운 형태이다. 중문은 석탑의 남쪽에, 금당과 강당은 석탑의 북쪽에 위치한다. 회랑은 남,동, 서 회랑이 확인되었고, 금당 좌우에는 동,서 회랑과 연결되는 주회랑이 있다. 이는 불국사에서도 볼 수 있는 형식이다.또한 중문의 남쪽으로 정교하게 쌓은 석축이 있으며, 이 석축의 바깥으로는 현재 못이 하나 남아 있다. 이를 용담이라 부르는데, 감은사가 대종천 변에 세워졌고 또 동해의 용이 드나들 수 있는 구조로 만들어진 것이라면 이 못이 대종천과 연결되어 있고, 또 금당의 마루 밑 공간과도 연결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고 한다.
달리는 차창으로 갑자기 푸른 해원이 뛰어든다. 바다! 언제 보아도 가슴 뛰는 그리움이다. 바닷가 솔밭 위에 세워진 이견대(利見臺)는 경주시 감포읍(甘浦邑) 대본리(臺本里) 661에 세워진 사적 제159호로 1967년 8월 1일에 지정된 통일신라시대의 유물로 지정면적은 4,135㎡ 이다. 이견대는 문무왕의 수중릉인 대왕암이 잘 보이는 곳에 위치한 건물이다. 이것은 681년 신문왕이 문무왕의 호국정신을 받들어 세웠으며 신문왕은 해변가에 감은사라는 절을 짓고 용이 된 아버지가 절에 돌아와서 돌아다닐 수 이도록 법당 밑에 동해를 향해 구멍을 하나 뚫어 두었다. 그 뒤 용이 나타난 곳을 이견대라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견대에서 신문왕이 용으로부터 세상을 구하고 평화롭게 할 수 있는 옥대와 만파식적이라는 피리를 하나 받았다고도 한다.
마지막 코스인 어물동 마애여래좌상 (於勿洞磨崖如來坐像)은 울산광역시 북구 어물동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마애불로 울산유형문화재 제6호로 1997년 10월 9일에 지정되었으며 본존불상 높이 5.2m이다. 이 마애불은 방바위라 불리는 거대한 바위에 일광(日光), 월광보살(月光菩薩)이 협시(脇侍)하고 있는 약사삼존불(藥師三尊佛)을 높게 돌을 새김한 것으로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이다. 삼존상을 조각한 암석은 석질이 단단하지 않아 삼존 모두 마멸이 심한 편이며 왼편 보살상의 일 부분은 암석의 파괴로 결실되고 있으나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우수작이다. 이 삼존의 주위에는 많은 기와 조각이 흙에 묻혀 있고 또 암석의 뒤편에서 보면 연목 같은 것을 걸쳤던 자리로 보여지는 돌을 판 자리가 있다. 이러한 것을 미루어 보아 옛날에는 이 암석에 집 을 지어 석불이 방안에 안치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 바위를 방바위라고 한다. 이 불상을 조각하였을 때의 절 이름은 알 수 없으나 지금은 석불암이라고 한다.
천년 세월을 화려하게 장식했던 신라의 정취와 문화 속에서 마음으로 옛 신라의 문화와 당대의 신라인들을 만나 잠시나마 호흡을 나눴던 경주를 떠나 울산으로 돌아오는 차 속에는 짝지와의 속닥속닥 얘기들이 꽃을 피운다. 그리고 남은 떡과 과일을 먹으며 음료수를 나누어 마시기도 한다. 가무로 요란스런 관광과는 대조적으로 아주 조용하며 오늘 우리가 함께 한 이 하루가 얼마나 큰 기쁨인지를, 행복인지를 그리고 무사히 귀가하게 된 것에 감사함을 느끼며 함께 한 선생님들, 학생 들 모두모두 사랑합니다! - 혜 강 - (2010. 5.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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